티스토리 뷰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를 몰랐습니다. 제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요. 사람이 죽어가는 장면인데 극장 안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고, 그 직후에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는 바로 그 불편한 감정을 설계한 영화입니다. 단순한 범죄극이 아니라, 일자리와 가족과 생존 본능이 뒤엉킨 이야기입니다.


분재 상징: 감독이 숨겨놓은 디테일들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화면 속 나무였습니다. 주인공 유만수는 제지업에 종사하는 인물입니다. 나무를 베어 돈을 버는 사람이죠. 그런데 그의 취미는 온실에서 나무를 정성스럽게 기르는 것입니다. 처음엔 그냥 개인 취향처럼 보였는데, 나중에 보니 감독이 의도적으로 설계한 이중성이었습니다.

이 장치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건 아내 미리가 만수의 넥타이를 매주는 장면입니다. 배경을 자세히 보면 분재나무들이 빼곡하게 놓여 있습니다. 여기서 분재(盆栽)란 나무를 자유롭게 두지 않고 쇠줄로 가지를 묶고 억지로 모양을 다듬어 키우는 방식입니다. 쉽게 말해 자연의 본연을 인위적으로 억제하는 행위죠. 감독은 아내가 남편의 넥타이를 조여주는 모습과 쇠줄에 묶인 나무를 화면 안에 겹쳐놓으며 도덕규범이 인간의 본능을 억누르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제가 직접 다시 돌아보니 영화 속 카메라에 잡히는 나무는 하나도 빠짐없이 분재 처리된 것들뿐이었습니다. 자유롭게 자란 나무가 단 한 그루도 없습니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계획된 미장센(mise-en-scène)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우 위치, 조명, 소품, 세트를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 연출 기법을 말합니다.

소리의 설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만수가 사회적 규범 안에서 살아가던 시절, 그의 주변은 매 울음소리, 풀벌레 소리, 바람에 스치는 잎사귀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처음 살인을 앞둔 장면에서는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조형필의 노래가 공간을 가득 채워 그가 주저하게 만들었고, 두 번째 살인 시도에서는 거센 파도 소리가 그를 압박했습니다. 반면 세 번째 살인 장면은 달랐습니다. 모든 소리가 사라졌고, 만수는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결말에서 만수가 귀마개를 끼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한 순간입니다. 거대한 기계 소리로 가득 찬 공장 안에서 귀마개를 끼는 행위는, 주변의 어떤 목소리도 듣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읽혔습니다. 손바닥에 빼곡히 적어두던 행동지침도 마지막 장면에서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를 억제하던 모든 장치가 소멸한 것입니다.

  • 분재 나무: 도덕규범이 본능을 억제하는 시각적 상징
  • 손바닥 메모 → 텅 빈 손바닥: 억제 장치의 해체 과정
  • 자연의 소리 → 기계 소리 → 귀마개: 본능 해방의 단계적 표현
  • 온실과 제지업의 대비: 인간 욕망과 도덕 사이의 내적 갈등
요약: 영화 속 모든 시각·청각 장치는 인간 본능과 도덕규범의 충돌을 정교하게 설계한 결과물이며, 감독의 미장센이 서사보다 앞서 말을 걸어온다.

 

블랙코미디와 자동화: 진짜 경쟁자는 누구인가

일반적으로 이 영화를 블랙코미디라고 부르는데, 저는 처음에 그 말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좀 어두운 코미디겠지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성민이 연기한 구범모와 염혜란이 연기한 아라가 얽히는 장면에서 완전히 다른 감각을 경험했습니다. 잔혹한 상황과 희극적인 연출이 동시에 작동하는데, 웃다가 갑자기 '내가 지금 뭘 보고 있지?'라는 불편함이 밀려왔습니다. 이 불편함이 바로 감독이 노린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병헌이 연기한 만수의 가장 무서운 점은 처음부터 악인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정규직 시절의 그는 직원들의 안전모를 챙기고, 부당해고에 맞서는 연설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 면접에서 'AI 도입으로 다른 직원들이 잘릴 수 있는데 거부감이 있냐'는 질문에 그는 냉정하게 답합니다. "감독할 사람 한 명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작은 선택들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는데, 영화는 그 전환점을 하나로 특정하지 않습니다. 그게 더 무섭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캐릭터 설계가 관객을 가장 오래 불편하게 만듭니다. 처음부터 사이코패스처럼 그려진 인물이었다면 관객은 쉽게 거리를 뒀을 겁니다. 하지만 만수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가장입니다. 그래서 그가 선을 넘을 때마다 '저 사람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저는 만수가 싸운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는 경쟁자인 다른 지원자들을 제거하면 자신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경쟁자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기술이었고, 자동화였습니다. 형사가 초반에 메모장을 들고 다니다가 후반에 아이패드를 들고 나타나는 장면은 이 흐름을 아주 조용하게 드러냅니다. 종이 수요가 줄면 제지 회사 매출이 줄고, 회사는 또다시 인력을 정리하는 구조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거대한 공장을 혼자 운영하는 만수의 모습이 바로 그 결말입니다.

케빈 미첼의 저서 《우리는 무엇을 타고나는가》(출처: YES24 도서 정보)에 따르면, 인간의 성격과 본성은 상당 부분 유전적으로 결정되지만 선택과 행동에서는 자유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영화는 이 지점을 정면으로 건드립니다. 만수는 계속 "어쩔 수가 없다"고 중얼거립니다. 그런데 앞서 두 번의 살인이 반쯤 사고였다면, 세 번째 살인은 달랐습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계산적으로 상대를 칭찬하고 자극하며 철저한 자유의지로 실행한 범행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합리화에 불과했다는 걸 감독은 그 장면으로 보여줍니다.

미리 역할도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그냥 아내 캐릭터로 볼 생각이었는데,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가족이라는 이유로 어디까지 함께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인물로 느껴졌습니다. 만수의 행동을 알고도 완전히 등을 돌리지 못하는 미리의 모습은 굉장히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 만수 혼자만의 변명이 아니라 가족 전체의 합리화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한국고용정보원 자료에 따르면 자동화·AI 기술 확산으로 제조업 일자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이며(출처: 한국고용정보원), 이 영화는 그 냉정한 현실을 블랙코미디라는 형식으로 포장했습니다.

요약: 만수의 진짜 경쟁자는 사람이 아닌 자동화였으며, '어쩔 수 없다'는 반복된 주문은 자유의지를 외면한 욕망의 합리화였다.

 

자주 묻는 질문

Q. 어쩔 수가 없다, 블랙코미디 처음 보는 사람도 재밌나요?

A. 장르에 익숙하지 않으면 초반에 톤 잡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블랙코미디는 웃겨야 하는 장면과 잔혹한 상황이 동시에 작동하는 장르인데, 이 영화는 그 균형이 꽤 날카롭습니다. 제 경험상 '불편한 웃음'에 거부감이 없는 분이라면 오히려 그게 이 영화의 매력으로 느껴질 겁니다.

 

Q. 영화 속 분재 상징, 일부러 찾으면서 봐야 하나요?

A.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화면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서 처음엔 그냥 배경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되돌아보면 감독이 화면 안 모든 나무를 의도적으로 배치했다는 게 보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속 시각 요소 전체를 설계하는 연출 기법인데, 이 영화는 그 부분이 특히 치밀합니다.

 

Q. 러닝타임 139분, 지루하지 않나요?

A. 솔직히 중반 이후 경쟁자를 제거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초반의 긴장감이 살짝 떨어지는 구간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2시간 넘는 장르 영화는 중반 이완이 약점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결말부로 가면서 복선들이 수렴되는 순간이 오기 때문에 끝까지 보고 나면 길이가 아깝지 않았습니다.

 

Q. AI 자동화 주제가 영화에서 얼마나 직접적으로 나오나요?

A. 대사로 직접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형사가 메모장 대신 아이패드를 들고 나오는 장면, 면접에서 AI 도입 관련 질문이 나오는 장면 등 배경처럼 스며들어 있습니다. 오히려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주인공이 목숨을 걸고 싸운 경쟁자가 결국 사람이 아니었다는 씁쓸함이 영화 내내 조용히 쌓입니다.

 

결론

저는 이 영화에 별점 4.3점을 주고 싶습니다. 편하게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영화를 기대하고 간다면 조금 길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생각이 이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분재 나무, 손바닥 메모, 귀마개, 아이패드 같은 소품 하나하나가 모두 서사와 연결되어 있고, 그것을 발견하는 재미가 따로 있습니다.

무엇보다 단순히 '살인을 저지르는 가장'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 좋았습니다. 일자리, 자동화, 가족, 본능과 도덕규범이라는 현실적인 주제를 아주 기괴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펼쳐냅니다.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 영화 안에서 얼마나 위험한 합리화인지, 극장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dWUaR8fNu8s

최근에 올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