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을 이미 잡아놓고도 피해자를 구하지 못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2008년 개봉한 《추격자》 얘기입니다. 처음 봤을 때 저는 '이게 스릴러가 맞나' 싶었습니다. 무섭다기보다 너무 답답해서 손에 땀이 났거든요.범인을 잡았는데 왜 이렇게 답답한가 — 답답함의 구조일반적으로 범죄 스릴러는 '범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긴장감을 만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추격자》를 봤을 때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영화는 초반부터 범인 지영민의 얼굴을 관객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질문 자체가 다릅니다. "범인이 누구냐"가 아니라 "피해자를 살릴 수 있느냐"로 바뀌는 거죠.이 구조를 내러티브 아이러니(narrative irony)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내러티브 아이러니란, 관객은 이미 진실을 알고 있는데 극 ..
솔직히 처음 봤을 때는 그냥 통쾌한 복수 영화인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남자가 살인마를 찾아가 응징하는 이야기.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제가 예상했던 감정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통쾌함이 아니라 묵직한 허무함이었습니다. 김지운 감독의 2010년작 〈악마를 보았다〉는 그런 영화입니다.미장센이 만들어낸 불편한 아름다움영화의 첫 장면부터 심상치 않았습니다. 눈이 쌓인 외딴 도로, 고요한 밤, 그리고 차 한 대. 제가 직접 봤을 때 느낀 건 "이게 왜 이렇게 아름답지?"라는 당혹감이었습니다. 분명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 직전인데, 화면은 너무나 고요하고 차가운 색감으로 가득했습니다.여기서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개념이 핵심입니다. 미장센이란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영화 용어..
솔직히 저는 〈내부자들〉을 처음 볼 때 "그냥 범죄 스릴러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악당이 누구인지 딱 집어서 말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정치인, 재벌, 언론, 검찰, 정치깡패가 한 덩어리로 얽혀 돌아가는 이 영화는, 제가 본 한국 영화 중에서 권력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가장 냉정하게 그린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권력구조 — 이 영화에서 진짜 무서운 건 '시스템'이었습니다처음에 저는 안상구(이병헌)가 이 영화의 중심이라고 봤습니다. 손목이 잘리고, 조직에서 버려지고, 복수를 다짐하는 인물이니까요.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안상구는 칼이고, 그 칼이 어디로 향할지를 정하는 건 따로 있다는 걸요.〈내부자들〉에서 가장 무서운 ..
솔직히 저는 처음에 〈신세계〉를 그냥 한국판 조폭 액션 영화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보고 나서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이자성이 결국 골드문의 새 회장 자리에 앉는 그 마지막 장면이, 단순한 출세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그 깨달음에서 시작됩니다.이자성의 잠입수사, 일반적인 믿음과 실제는 달랐다잠입수사(Undercover Operation)란, 수사관이 신분을 숨기고 범죄 조직 내부에 침투해 증거를 수집하는 수사 기법입니다. 여기서 잠입수사란 수사관이 표면적으로는 조직의 일원으로 완전히 기능하면서 내부 정보를 취득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통상적으로 이런 영화들은 '잠입한 경찰이 결국 조직을 무너뜨리고 귀환한다'는 구도로 끝납니다. 저도 그걸 당연하..
2016년 개봉한 김지운 감독의 영화 〈밀정〉은 실제 역사 사건인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작품입니다. 처음 봤을 때 저는 그냥 첩보 액션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머릿속에 남은 건 폭발 장면이 아니라 "이정출은 도대체 어느 편이었던 걸까?"라는 질문 하나였습니다.이정출이라는 인물,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렸습니다〈밀정〉에서 이정출은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입니다. 직책은 경부(警部). 여기서 경부란 지금으로 치면 경찰 간부급 직책으로, 당시 조선인이 오르기 매우 힘든 자리였습니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그가 얼마나 복잡한 위치에 있는 인물인지가 느껴졌습니다.영화 초반에 이정출은 의열단을 잡기 위한 수사를 하면서도, 의열단 리더 김우진과 가까워집니다. 상하이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
처음 봤을 때는 솔직히 그냥 복수 영화인 줄 알았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15년을 갇혀 있다가 나온 남자가 범인을 추적한다는 설정만 보면 그렇게 읽힐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마지막 장면까지 다 보고 난 뒤 저는 한동안 화면만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2003년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가 올해 20주년을 맞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이 영화가 계속 회자되는 이유, 지금부터 제가 직접 뜯어보겠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영화를 보지 않으셨다면 먼저 보시길 권합니다.죄의식이라는 뼈대 — 이 영화가 단순한 복수극이 아닌 이유를 처음 보면 대부분 오대수의 시점에 완전히 끌려갑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왜 감금됐는지 모르는 채로 15년을 버티고, 풀려난 뒤에는 자신을 가둔 사람을 찾아 나서는 과정이 워낙 강렬하다 ..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3편을 보고 나서 "이 시리즈도 이제 한계에 왔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4편은 달랐습니다. 1편부터 4편까지 모두 극장에서 챙겨 본 입장에서, 이번 편은 꽤 오랜만에 "아, 이 맛이지" 싶었던 작품이었습니다. 시리즈 비교부터 백창기 분석, 그리고 극장에서 볼 만한 이유까지 제 경험을 바탕으로 정리해봤습니다.시리즈 비교: 3편에서 잃었던 걸 4편이 되찾았다범죄도시 시리즈는 누적 관객 수만 봐도 규모가 보입니다. 1편 688만, 2편 1,269만, 3편 1,068만. 숫자만 보면 꾸준하지만, 실제로 극장을 나오면서 느끼는 온도는 편마다 꽤 달랐습니다.제가 직접 보고 느낀 기준으로 말하면, 1편이 가장 좋았습니다. 당시 범죄도시가 보여준 느와르 감성, 즉 어둡고 축축한 분위기와..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141분 내내 손에 땀을 쥐었습니다. 영화 〈서울의 봄〉 얘기입니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 쿠데타가 성공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전화 한 통이 오갈 때마다 "이번에는 혹시 달라지지 않을까" 하고 자꾸 생각했습니다. 결말을 아는 영화가 이렇게까지 긴장되는 건 처음이었습니다.결말을 알아도 긴장되는 이유 — 과정적 긴장감의 구조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원래 결말이 정해진 역사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어떻게 된다는 걸 아는데 뭐가 재밌겠냐 싶었거든요. 그런데 〈서울의 봄〉을 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영화는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직후를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보안사령관 전두광이 합동수사본부장..
2024년 개봉한 영화 〈파묘〉는 국내 누적 관객 1,200만 명을 돌파하며 한국 오컬트 장르의 새 기록을 세웠습니다. 처음 예고편을 봤을 때는 솔직히 "무덤 파는 공포 영화겠지" 싶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보고 나서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 영화는 귀신 이야기로 시작해서 우리 땅과 역사 이야기로 끝납니다.배경과 맥락 — 무덤 하나가 어디까지 커지나영화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재미교포 자산가 박지용의 의뢰로 시작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이유를 알 수 없이 울음을 그치지 않고, 집안 장자들만 대를 이어 불행을 겪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무속인 화림은 이를 묘바람으로 진단합니다. 묘바람이란 조상의 묘소에 문제가 생겨 그 기운이 후손에게 화로 되돌아오는 현상을 가리키는 무속 용어입니..
솔직히 말하면, 저는 처음 〈곡성〉을 보고 나서 "내가 뭘 본 건지 모르겠다"는 말을 입 밖에 냈습니다. 무서운 장면은 분명히 있는데 공포 영화라고 하기엔 뭔가 다르고, 무당이 나오는데 무속 영화라고 정의하기도 애매했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 결국 곡성 결말 해석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그게 오히려 더 큰 혼란의 시작이었습니다.외지인 정체와 곡성 결말, 팩트로 정리하면〈곡성〉(2016)은 나홍진 감독이 연출한 한국 오컬트 스릴러입니다. 개봉 당시 전국 관객 688만 명을 동원했고(출처: 영화진흥위원회 KOBIS), 칸 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되며 국제적으로도 주목받았습니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지금까지 '곡성 결말 해석'이 검색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