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처음 봤을 때는 그냥 통쾌한 복수 영화인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남자가 살인마를 찾아가 응징하는 이야기.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제가 예상했던 감정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통쾌함이 아니라 묵직한 허무함이었습니다. 김지운 감독의 2010년작 〈악마를 보았다〉는 그런 영화입니다.미장센이 만들어낸 불편한 아름다움영화의 첫 장면부터 심상치 않았습니다. 눈이 쌓인 외딴 도로, 고요한 밤, 그리고 차 한 대. 제가 직접 봤을 때 느낀 건 "이게 왜 이렇게 아름답지?"라는 당혹감이었습니다. 분명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 직전인데, 화면은 너무나 고요하고 차가운 색감으로 가득했습니다.여기서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개념이 핵심입니다. 미장센이란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영화 용어..
솔직히 저는 〈내부자들〉을 처음 볼 때 "그냥 범죄 스릴러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악당이 누구인지 딱 집어서 말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정치인, 재벌, 언론, 검찰, 정치깡패가 한 덩어리로 얽혀 돌아가는 이 영화는, 제가 본 한국 영화 중에서 권력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가장 냉정하게 그린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권력구조 — 이 영화에서 진짜 무서운 건 '시스템'이었습니다처음에 저는 안상구(이병헌)가 이 영화의 중심이라고 봤습니다. 손목이 잘리고, 조직에서 버려지고, 복수를 다짐하는 인물이니까요.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안상구는 칼이고, 그 칼이 어디로 향할지를 정하는 건 따로 있다는 걸요.〈내부자들〉에서 가장 무서운 ..
솔직히 저는 처음에 〈신세계〉를 그냥 한국판 조폭 액션 영화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보고 나서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이자성이 결국 골드문의 새 회장 자리에 앉는 그 마지막 장면이, 단순한 출세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그 깨달음에서 시작됩니다.이자성의 잠입수사, 일반적인 믿음과 실제는 달랐다잠입수사(Undercover Operation)란, 수사관이 신분을 숨기고 범죄 조직 내부에 침투해 증거를 수집하는 수사 기법입니다. 여기서 잠입수사란 수사관이 표면적으로는 조직의 일원으로 완전히 기능하면서 내부 정보를 취득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통상적으로 이런 영화들은 '잠입한 경찰이 결국 조직을 무너뜨리고 귀환한다'는 구도로 끝납니다. 저도 그걸 당연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141분 내내 손에 땀을 쥐었습니다. 영화 〈서울의 봄〉 얘기입니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 쿠데타가 성공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전화 한 통이 오갈 때마다 "이번에는 혹시 달라지지 않을까" 하고 자꾸 생각했습니다. 결말을 아는 영화가 이렇게까지 긴장되는 건 처음이었습니다.결말을 알아도 긴장되는 이유 — 과정적 긴장감의 구조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원래 결말이 정해진 역사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어떻게 된다는 걸 아는데 뭐가 재밌겠냐 싶었거든요. 그런데 〈서울의 봄〉을 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영화는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직후를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보안사령관 전두광이 합동수사본부장..
처음 봤을 때와 두 번째 봤을 때 완전히 다른 영화처럼 느껴진 작품이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그랬습니다. 처음엔 웃기고 스릴 넘치는 이야기였는데, 다 보고 집에 오는 길에 뭔가 씁쓸한 게 계속 남아서 다음 날 한 번 더 봤습니다. 두 번째로 봤을 때 저는 첫 장면부터 전혀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위에서 아래로, 영화가 설계한 계층 구조영화를 처음 볼 때는 기택 가족이 박 사장 집에 하나씩 들어가는 과정이 그냥 통쾌하게 느껴졌습니다. 기우가 학력을 위조해 과외 선생님 자리를 얻고, 기정이 미술 치료사로, 기택이 운전기사로, 충숙이 가사도우미로 들어가는 일련의 흐름이 마치 영리한 사기극처럼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보니 봉준호 감독이 그 재미 뒤에 아주 치밀하게 무언가를 숨겨..
솔직히 저는 《타짜》를 처음 봤을 때 그냥 도박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보고 나서 며칠 동안 고니와 아귀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1편부터 3편까지 다시 돌려보고 나서야 이 시리즈가 단순히 화투판을 배경으로 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욕망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아주 집요하게 파고드는 영화였습니다.타짜 시리즈가 만들어진 배경과 세계관《타짜》 시리즈는 허영만 작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합니다. 원작 만화는 1990년대 한국 도박 문화의 이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해서 당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제가 원작 만화를 나중에 찾아봤을 때, 영화가 얼마나 충실하게 그 분위기를 살렸는지 새삼 놀랐습니다.1편(2006)은 화투를 중심으로 고니라는 청년이 타짜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이야기입..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연상호 감독의 신작 《얼굴》을 보고 나서 그 확신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40년 동안 실종된 어머니, 얼굴도 모른 채 치르는 장례식, 그리고 "못생겼다"는 한 마디로 기억되는 한 여성의 이야기.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제목 '얼굴'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1인 2역이 만들어낸 감정의 구조일반적으로 1인 2역이라고 하면 쌍둥이나 변장 같은 설정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얼굴》에서 박정민이 맡은 두 역할은 그런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1인 2역이란, 아들 임동환이 아버지 이명규의 젊은 시절을 동시에 연기하는 구조입니다. 쉽게 말해 아들이 아버지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스크린 위에서는 그 아버지를 직접 연기하는 배우와 마주치는 ..
솔직히 말하면, 저는 처음에 이 영화 제목만 보고 멜로 영화인 줄 알았습니다. 《남편들》이라니. 그런데 알고 보니 한 여자의 전남편과 현남편이 똑같이 손을 들고 "제가 황현주 학생 아버지입니다"라고 외치는 코미디 액션이었더라고요. 예고편을 보는 순간, 이건 그냥 그 느낌이다 싶었습니다. 《극한직업》 이후로 오랜만에 뇌를 완전히 비울 수 있는 한국 영화가 왔다는 느낌이요. 전남편과 현남편이 한 팀이 된다는 설정, 실제로 보면 어떨까제가 직접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든 첫 번째 생각은 "설정 하나로 영화 절반은 먹고 들어갔다"는 거였습니다. 초등학교 웅변 대회에서 황현주 학생의 아버지가 두 명이 손을 드는 오프닝 장면부터, 이미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웃음을 뽑아낼지 다 보이거든요.진선규가 연기하는 황충식은 마..